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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먹을 거 줄이고 살 좀 빼겠다는 생각에 점심을 간단하게 먹은 적 있다. 그렇게 남는 점심시간이 40분 정도 있었다. 40분이면 근처 산책 다녀오기 딱 좋은 시간이다. 이상하게 그날은 기묘한 기분에 끌려 근처에 있는 시립미술관엘 갔다. 미술관 1층부터 3층까지 각기 다른 전시가 알차게 준비돼 있었다.


특히 3층에서는 젊고 열정 있는 작가들이 준비한 현대미술 작품들이 즐비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전시장에 들어서려는 순간 나를 제지하던 사람이 나타났다. "음료 들고는 출입이 안 돼요." 내 손에 들려 있는 뜨거운 커피 한 잔. 그 별거 아닌 액체는 수많은 열정을 쏟아내 완성시킨 작품을 해칠 수 있는 유해물질이었다. 전시 관리자 말은 내 발걸음을 뚝 멈춰 세웠다. 


얼음 가득한 시원한 커피였으면 한달음에 마시고 전시관에 들어갔겠지만, 내 손에 들린 건 여전히 열기를 뿜어대는 뜨거운 커피였다. 나는 어쩔 수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근처를 기웃거리면서 그날 점심 시간을 미술관 복도에 헌납했다.


5분 거리조차 되지 않는 미술관인데, 다음번에 오면 되겠지 하면서 난 끝내 3000원짜리 커피를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 후 다시 한 번 여유로운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착한 미술관은 굳게 문을 닫은 상태였다. 월요일마다 휴관이라는 걸 그때야 알게 됐다. 그날은 미술관 앞뜰에서 고즈넉한 점심시간을 보내는 직장인들 표정만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며칠 후엔 작은 오기를 품고 억지로 시간을 내 미술관엘 찾았다. 곧바로 3층 전시장으로 향했다. 이번엔 전시장을 가로막는 건 사람도 아닌 안내문이었다. '다음 전시를 준비 중입니다.'


내가 꼭 보고 싶어 삼고초려하게 된 그 전시는 이미 막을 내린 상태였다. 다음에 보면 되겠거니 했던 내 안일했던 생각이 원망스러웠던 순간으로 변모했다. 우씨, 그거 하나 보겠다고 기대를 하고 왔는데...


그날은 미술관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샀다. 2층에 올라 난간에 걸쳐 섰다. 1층에서 점심 이벤트에 참석한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은 수십 분도 안 되는 이벤트를 순식간에 마치고 뿔뿔이 흩어졌다. 구경조차 허무한 느낌이었다.


그날은 내 작은 인생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했던 과거의 포기가, 언젠가는 찌릿찌릿한 실망이 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받았다.  그때 그냥 뜨거운 커피를 목이 데어가는 기분으로 벌컥벌컥 마셔버리고 당당하게 전시관에 들어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 그때 그냥 근처 있는 화장실 세면대에 커피를 버리고 전시를 볼 걸 그랬나. 그깟 커피가 뭐라고.


그날 미술관은 미술 작품 없이 나에게 깨달음을 전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