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블루스에 대한 단상

 블루스의 기원은 신대륙에서의 흑인 노예 시절까지 올라간다. 17~18세기 미국의 흑인은 고단한 착취 속에서 기댈 곳이 많지 않았다. 하나는 종교, 즉 구원을 통한 현실 극복의 의지였고, 다른 하나는 노동요, 즉 음악을 통한 신체적 역경의 완화였다. 전자는 흑인의 뛰어난 음악적 본능 덕에 가스펠이라는 음악으로 발전했고, 현대 대중음악의 근간에 영향을 끼친 줄기세포 같은 역할을 했다. 반면 후자는 대중음악에서 슬픔을 담는 그릇이 되는 장르의 탄생이 되었다. 그 음악이 바로 블루스인데, 블루(Blue)의 어원은 슬픔이다. 끝없는 노동, 백인의 탄압을 견디며 흑인은 같은 어구가 4번 반복되고, 주거니 받거니하는 블루스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의 근본은 슬픔과 비애로 점철됐다.


노예 해방과 흑인 인권 신장으로 블루스도 본래의 역할에서 자유를 맞았다. 그러나 오랜 기간 불려진 노래는 도태되지 않았다. 블루스는 노동요와 종교적 색채를 잠시 멀리하고, 다른 비애와 통한을 찾았다. 바로 세상 살이의 모든 슬픔이었다. 인류의 번영이란 양지 근처엔 항상 음지가 있기 마련이었고, 그 슬픔의 영역은 블루스가 탄생하는 곳이 되었다. 블루스는 사랑의 애수가 있는 곳에 자리 곳, 일상다반사에서 인간의 행위의 반작용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서 피어난다.


블루스는 느린 템포에 시끄럽지 않은 세션에 멜로디 역할을 하는 기타나 하모니카, 브라스를 큰 틀로 한다. 자연스럽게 곡에서 풍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블루스는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최초 블루스가 되었던 노동요는 여러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것이 유일한 특징이었지만, 이제 현대 블루스에선 그 목소리는 블루스에서 없어도 된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슬픔을 형편 없이 묘사하는 방법은 없다. 이렇듯 사람의 목소리 없이도 블루스는 비탄은 정교하게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블루스를 좋아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즐기는 까닭은 슬픔을 슬픔으로만 두지 않도록 하는 게 블루스이기 때문이다. 블루스를 듣는 다는 건 슬픔이란 감정의 동요, 그리고 폭발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니다. 블루스는 슬픔을 조목조목 읊어가면서 슬픔의 한계를 드러내 준다. 슬픔을 간지럽히면서, 초월시키는 것이 블루스이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비애의 감정에 휩싸일 때, 혹은 휩싸이고 싶을 땐 발라드가 아닌 블루스를 튼다. 발라드가 눈물을 자아내서 슬픔을 유지하고 연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블루스는 슬픔을 초탈하고 상쇄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블루스를 듣는다.


카트리나에 상처 입은 이들은 카트리나를 노래로 불러 카트리나의 아픔을 극복한다. 카트리나라는 비극이란 기억을 금기시하고 외면한다면, 그 슬픔은 극복될 수 없으니까. 블루스는 이처럼 슬픔을 은유하지 않는다. 아픔을 은유하고 비껴 말하는 음악은 그 아픔을 극복할 수 없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