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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태풍 '차바' 그 이후, 제주도



 11월 6일부터 3일간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습니다. 전에는 늘 여름에만 방문했던 제주도였고, 혼자나 친구들과 함께 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의 제주 여행은 기대와 낯섦 둘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건부가 달린다고 하더라도 제주는 역시 제주였습니다. 햇살과 어우러지는 수목과 봉긋하기부터 우람하기까지 한 오름까지 고개를 돌리는 족족 경탄의 대상밖에 없었습니다.

정신 없이 제주에 취하는 가운데도 이따금씩 알 수 있는 구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태풍 '차바'의 흔적이었습니다. 얇은 가지들은 죄다 송두리째 부러진 수많은 해송들을 마주하면서, 날개 하나가 부러진 풍력발전기를 보면서, 산굼부리의 억새가 절반은 날아갔다고 전하는 해설을 들으면서 한 달 전 제주를 할퀴었던 존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망가진 시설들, 관리가 안 된 거 같은 장비들을 목격할 때면 태풍의 흔적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는 그럼에도 여전히 제주였습니다. 제주의 풍광은 아름답다고 할 만 했고 실망하고 돌아가는 관광객은 없었습니다. 산굼부리의 억새에 넋이 나가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달 전 태풍이 제주에 큰 상처를 입혔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서울에서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했던 서울사람인 저에겐 제주는 여전히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태풍이 없었으면 더 아름다웠을 거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런 풍경을 직시하면서 사실 잘 공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여자, 돌 그리고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에게 태풍 '차바'는 그 많은 바람 중 하나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제주가 생성 이후 이겨왔던 무한 개의 바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제주가 얻은 상처와 고통 자체가 제주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제주가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는 터전이었다면 지금의 모습을 갖춘다는 건 가당키나 한 이야기일까요. 잦은 흡집과 고난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들을 늠름하게 이겨낸 증거가 바로 제주 그 자체였습니다.

제주의 오름 꼭대기에 오르면 태풍 같은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엔 태풍 같은 바람을 타면서 신나게 노는 까마귀가 있고, 삼나무는 여전히 곧고 높게 평행을 그리고 있고, 센 바람에 리듬을 타며 흔들리는 감귤은 도처에 있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오든지 간에 풍력발전기는 경쾌하게 돌고 있고, 돌담은 바람을 흘리며 그 어느때보다 견고해지기만 하고 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제주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제주는 아픔에 찡그릴지언정 비통해하지 않았습니다. 매서운 바람을 두고 미워하긴커녕 그저 "많다"고만 하는 곳이 제주였습니다. 제주 곳곳에 자리잡은 화산 지형들과 자연생태는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여행지가 되고 삶의 안식처가 됐습니다. 제주를 보면서 제 자신을 보면 자아성찰의 좋은 기회는 물론 기폭제가 됩니다.
"제주에 가시려거든 그가 끌어안은 상처도 "왕 방 강 잘 고라줍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