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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덩케르크'가 던진 우리 시대 '실패'의 해체



크리스토퍼 감독의 테마는?

그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몇 년에 한 번씩 영화관에서 놀란 영화를 보며 큰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건 비단 저만 향유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항상 영화를 보고나면 관객에게 심미나 관념으로 영화적 충격을 안겨준 놀란 감독이 이번에도 돌아왔습니다. 이쯤 되면 그가 보여줬던 영화 테마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많은 평론가나 영화분석가가 말한 것처럼 놀란의 영화는 'OO으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다크나이트 시리즈는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탈출, 인셉션에서는 꿈에서의 탈출, 그리고 인터스텔라는 우주(미지)로부터의 탈출을 그렸습니다. 덩케르크는 전쟁에서의 탈출이란 점에서 놀란 영화에 일맥상통하는 통일감을 유지합니다.
또 시간을 자유자재로 비트는 '시간 연금술사'라는 테마로 놀란의 영화를 읽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는 인셉션에서 하나의 꿈에선 불과 몇 초의 순간이 깊은 꿈에서는 몇 분이었고, 더 깊은 꿈에선 몇 시간이었던 시간의 상대성을 그린 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터스텔라에서도 파도치는 행성에서의 1시간이 지구에서의 7년과 같은 설정으로 시간의 상대성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덩케르크에서도 땅, 바다, 하늘 위 세 공간에서의 서로 다른 시간을 표현한 것으로 이전 작품과 같은 궤를 합니다.


놀란의 새로운 시도

하지만 저는 이런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덩케르크를 보고 싶습니다. 왜냐. 이번 영화는 놀란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전 영화들의 소재 선택부터 관객의 구미를 확 잡아당기곤 했습니다. 배트맨, 꿈, 우주. 그러나 이번엔 블록버스터 감독의 선택답지 않은 실제 배경이었던 '다이나모 작전'을 선정했습니다. 전쟁이라는 소재가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라 덩케르크라는 그런 양태의 전쟁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영화에서 줄 수 있는 감흥은 전쟁 영웅이 적을 깨부수는 카타르시스라던가, 전우의 죽음이라는 슬픔의 원천, 또 국뽕으로 비꼼 받는 애국심 코드 정도입니다. 그러나 덩케르크는 이런 전쟁 서사가 줄 수 있는 코드가 하나도 없습니다. 패배한 전쟁의 결과 속에서 성공이 희박한 퇴각 작전을 다뤘고, 온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독일군은 담아내지도 않았고, 그 어떤 인물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아 신파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영국이라는 대단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국뽕이 필요하다면 덩케르크 말고 역사상 극적이거나 이야기할 여지가 많은 수많은 전쟁과 전투들이 있을 텐데 굳이 최악의 사례 중 하나인 덩케르크여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차고 패색 짙은 덩케르크의 모습은 일찍이 전쟁 영화의 소재가 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다만 '어톤먼트'에서 주인공의 비극적인 일생 중 한 순간으로 기능하는 데에는 충분한 배경이었습니다.
또 전쟁이라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점은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이 항상 창조적일 수 있었던 기존 영화와는 다른 노선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변수로써 영화관을 찾기 전 관객의 흥미와 기대를 증폭시켰던 요인들이 덩케르크에서는 상수가 되었습니다. 관객들은 영화관을 찾기 전부터 이미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 있거나 쉽게 인터넷 검색으로 알 수 있는 소재였습니다. 게다가 그 사실엔 영화화할 만한 눈에 띄는 재료들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영화의 킬링 포인트를 각본 단계에서부터 잘라낸 놀란 감독은 덩케르크에서 다른 걸 기대한 건 아닐까요.



연출력 스웩이거나 메시지 투척이거나

어쨌든 영화는 최근 몇 작품에서 쌓아온 놀란 감독의 흥행 공식을 깨뜨렸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는 호불호 영화라는 딱지가 붙어버렸고, 아무 감흥 없이 영화관을 나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관객 수도 7월 25일 기준 160만 명에 그치는 수준입니다. 경쟁작의 개봉이 앞으로 줄을 잇고 있어 1천만의 인터스텔라, 5백만의 인셉션을 넘을 순 없을 게 자명합니다.
이런 흥행 보증을 포기하는 소재를 선택함으로써 결국 놀란 감독은 다른 곳에 힘을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소재에 힘을 빼고 연출력에 힘을 올인해 감독의 역량을 뽐내려는 스웩(swag)을 염두에 두었거나 혹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거나 그런 의도 말입니다. 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후자를 선택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합니다. "놀란 감독은 이번 덩케르크를 통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지난 주 '알쓸신잡(7월 21일 분)'에서는 독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많은 독서가 항상 좋은 것이 아니며 어떻게 독서를 하냐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패널들이 이야기를 쏟아낸 장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모두가 공감을 한 이야기는 김영하 작가의 발언이었습니다. 책 한 권을 다 읽어내는 것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책이 기쁨이나 슬픔처럼 나에게 무엇을 줬는지를 생각하면서 책을 읽어야 한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말을 참고해 말하자면, 저에겐 덩케르크는 실패를 감내해야만 하는 실패자의 입장에서 감동을 받은 영화였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전멸의 순간에는, 생존이 곧 승리다"

영화는 실패를 다룹니다. 세계 2차대전에서 독일군에 포위되어 독안의 든 쥐가 독 바깥으로 어떻게 도망가는지 담아낸 영화에 불과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두 번의 고통을 겪습니다. 하나는 전투 패배로 인한 생명존속의 위기로 인한 공포입니다. 그래서 영국 송환을 위해 프랑스군을 경계하거나 동료까지 위협하며 생존에 집착합니다. 다른 고통은 바로 국민으로부터 받을 질시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패잔병으로써 사지 무사히 돌아왔지만 나라의 안보와 자존심을 격하시킨 장본인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영화는 덩케르크에서 병사들이 가진 두 패배적 전리품에 대한 해체를 시도합니다. 패잔병이 겪은 죽음의 공포는 모든 영국 국민의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몫을 해내는 것으로 그려냅니다. 잦은 독일 공군의 폭격에 공군은 항상 덩케르크에 있던 병사들의 비아냥거림만 들었지만, 기지로 복귀할 연료까지 다 소비해가며 자신의 일임 이상을 해내고 포로가 되는 파리어의 모습을 담아냅니다. 또 자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진 않을지언정 자그마한 배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아가는 영국인들의 모습, 그 과정에서 죽음에 이르는 소년 '영웅' 조지, 그리고 해군 사령관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내고 연합군인 프랑스군을 위해서까지 전쟁터에 남는 볼튼 중령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그래서 결국 33만 명을 구해낸 '다이나모 작전'이 실패의 우연적 극복이 아닌 실패의 필연적 성공임을 그려냈습니다.
두 번째 국민의 패배에 대한 손가락질에 대한 공포 해체는 간단했습니다. 바로 그 우려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불안하고 상처 받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들춰내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덩케르트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담요와 차를 받아 들면서도 의심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맥주병을 받아들고 신문을 읽으면서 그 공포가 허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실패에 대한 주변인의 질타는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역할을 해오다 실패할지언정 무사히 돌아온 자체로 영국인들은 두 손 들고 환영했습니다. 영화 속 환영하는 인파에 던진 "그냥 살아서 돌아온 것뿐인데요?" 질문에 "그거면 충분해"라는 답처럼 말이죠. 실패한 사람은 객관화가 어려워지고 성과가 없는 현실에 침착하는 경향 때문에 스스로에게 박한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들춥니다.
덩케르크는 실패했음에도 실패가 또 다른 실패를 낳게 하지 않는 모습을 조망했습니다. 33만 명의 생존이 이후 영국의 재기에 큰 힘이 되었고, 실패의 경험을 딛고 더 크게 도전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뒀습니다. 놀란 감독은 실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뜨리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덩케르크에 처한 실패가 결국 영국의 성공이었던 점을 통해 도출한 형용모순적인 가치가 이 영화의 묘미가 된 것처럼 말이죠.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젊은이들만 총알받이 되는가?

배 속에 있는 자기 짐을 한숨에 다 털어놓고 구명조끼를 가득 담아내고 왜 굳이 전쟁터로 가냐는 물음에 도슨이 내놓은 한마디입니다. 영화 내외에서도 울림이 큰 이 한마디는 전쟁의 참혹함과 아이러니를 잘 담아냅니다. 섣부르게 일대일로 비교하기엔 그렇겠지만 덩케르크의 장면은 어쩌면 우리 현실과 매우 흡사합니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말이죠. 기성세대가 이뤄놓은 물적 풍요로움으로 태어나서부터 비교적 풍요롭게 살아왔다고 하지만, 다 자라서 맞은 사회는 기성세대들의 그 시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본디 실패가 일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재수는 필수고, 삼수는 선택이다' 대학의 문을 여는 순간에도 실패는 필연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길목도 독일군에 둘러싸인 덩케르크의 연합군 같은 꼴이었습니다. 청년실업자 약 44만 명이 서로 사회로 나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재를 불안에 떨며 살고 있고, 앞으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덩케르크 생존자들과 똑같이 자신의 부진과 실패로 인한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입니다. '혹시 나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이러고 있어서 실망하는 건 아닐까'
이 영화를 통해 청년을 비롯한 우리 시대에서 승리만 하며 살지 않는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바로 덩케르크의 그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서는 생존이 곧 승리라는 말을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구나 성공할 순 없는 어려운 시대, 비교하자면 전쟁입니다. 누구나 많고 적게 패배를 하는 시절입니다. 그래서 묵묵하게 버티는 행위 자체가 승리라는 덩케르크식 패배의 해체 메시지를 가슴 속에 담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패배의 시대 속에서 포기하지도, 단념하지 말고 그저 버티고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곁에 있는 누구든 "그거면 충분해"라고 말해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