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한 서울대생의 자살에 대해

 그저께 한 서울대생이 대학교 커뮤니티에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을 했다.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는 기자들에게도 매력적이었고 누리꾼들도 떠들기 좋은 소재였다. 일류 대학생 답게 유서 속에 담긴 문장 하나하나는 미려했고, 철학적 고찰이 묻어있었고, 자살의 결심까지 이른 사고과정의 우직함도 엿보였으니 여느 다른 자살과는 다른 콘텐츠였다. 그의 죽음은 처음부터 소비되기 바빴다.


이 사건은 그 과정 속에서도 기자들과 누리꾼들에게 철저하게 오해 당했다. 기자들은 유서 속에서 언급된 '수저색깔론'에 집중해 헤드라인을 내보냈고, 한국에서 가장 엘리트라는 '서울대 학생'에 방점을 뒀다. 게다가 후속 기사로는 고인이 정말로 흙수저 색깔인지 고인의 가정 형편을 조사해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누리꾼들도 고인의 부모가 각각 대학교수와 교사임을 알게 됐고 집안 살림도 그렇게 어려운 편이 아님을 알게 되더니 비로소 쓴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힘든 사람도 잘 살아가는데 자살해버리네"라든가 "살만할 텐데 왜 죽었지"라든가 하는 반응이다. 자기가 흙수저도 아니면서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는 건 틀렸다. 고인은 자신이 흙수저라서 죽는다고 유서 속에서 밝힌 적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서에서 분명히 밝혔듯, '지금은 너무 힘이 듭니다. 동시에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라고 말했다. 본인의 생활고가 괴로워서 죽는 게 아니다. 자신이 마주한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이 핵심이다. 부끄러움이 그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인데도 이 세상 사람들을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혀만 끌끌 차고 있다. 지금도 댓글창에 쓴말을 내던지는 사람들은 고인의 큰 마음에 동할 수 없는 범인(凡人)임은 분명하고, 어쩌면 그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그의 우울증을 다독여주지 못한 채 죽음에 몰아넣은 범인(犯人)일 수도 있다.


그가 죽은 까닭은 수저색이 인생을 결정하는 우리네 사회 모습을 보고 통탄했기 때문이다. 그는 좀 더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구조의 불합리를 깨달았고, 비극의 무한궤도가 끊어질 희망을 찾지 못해 좌절을 했다. 소시민적 시각으로 자기 배가 배부르지 못하고 따땃하지 않아서 '우라질 세상아'하면서 죽은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소시민들의 협소한 시각은 대인의 시각과 전혀 같지 못했다. 언론은 그런 소시민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한 대학생의 투신자살은 세상에게 위로 받지 못한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모양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엔 고인은 '끈기없는 놈'으로, 그리고  '한심한 놈'으로 남을 모양이다.


가장 최선의 길을 생각했을 때 '자살'이라는 선택을 한 고인은 스스로는 합리적이었지만,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는 세상의 따가운 눈빛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이 세상에 화두를 던저줬으면 한다. 고인이 원했던 대로 말이다. 그는 결국 금전두엽보다 금수저가 우월하다고 손을 들고 건물에서 뛰어내렸지만, 우리는 그가 잘못된 생각을 했었음을 증명해야한다. 이것은 어쩌면 고인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