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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신영복 선생님을 추모하며

 

 

- 그분을 처음으로 만난 건 고2 중간고사 국어 시험이었다. 교과서를 제외하고 책 2권이 시험 범위에 포함된 까닭이었다. 시험을 대비하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읽어야만 했다. 하지만 난 시험 당일까지 책을 읽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별 수 없이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책 표지만 얼렁뚱땅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글은 책에서 가장 유명한 글귀였고, 그 내용은 주관식 1번에 보란 듯이 나왔다. 나는 아이구 웬 떡이야 하면서 정답을 맞출 수 있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징역의 열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 고3에도 만날 수 있었다. 급훈을 정하는 과정에서 좋은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고, 이때 담임선생님이 내놓은 제안이 '처음처럼'이었다. 우리는 술을 좋아하는 선생님이 그때 당시 막 출시된 소주 이름을 가져왔다고 생각해서 피식피식 웃고 넘겼다. 그렇게 '처음처럼'은 칠판 우상단에 걸려 고3 내내 서로에게 '처음처럼 열심히 좀 해야지'라는 식으로 활용되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처럼'말고 12년동안 학교 다니면서 기억나는 급훈은 없었다. '처음처럼'만큼 순수하고 청량한 수사구가 있을까.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대학교 와서 만난 건 1학년 때 들어야하는 수업 책에서였다. 그분이 강의하면서 집필한 책이었는데, 고전을 읽고 배우는 데 있어서 어린 시절 글자 배우듯 매우 친절했고 이해가 빨랐다. 학기 중간을 넘어가면 대개 수업내용에 권태를 느끼곤 하는데, '강의'는 그 권태가 자리 잡을 수 없는 흡인력있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입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

 

- 작년에 그분의 신간이 출간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2014년 겨울학기를 마지막으로 이제 강단에서 내려왔고, 마지막 강의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었다. 그 책을 냉큼 읽으려고 해서 책을 구해놨지만, 여전히 책갈피는 몇십 페이지도 넘지기 못한 곳에 꽂혀있다. 책은 '마지막 강의'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는데, 마지막 책이 되어버렸다..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그분이 내 인생에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쉴 새 없이 내 인생 사이사이에서 꾸준한 가르침을 준 분이었다. 
딱 지금 내 나이 때다. 그분은 억울하게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수가 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그렇게 2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48살의 나이로 세상에 나왔다. 그분의 삶을 반추해보면서, 훌륭한 선생을 감옥으로 보낸 이 나라의 어처구니 없는 과거를 안타까워하고, 여전히 크게 바뀌지 않은 이 나라의 현재를 다시 한번 안타까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