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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참 언론인, 참 인간



 5일 동안 Y모 언론사에서 현장실습을 했다. 사실 4차 전형인 현장실습을 시작할 때 5일 동안 출퇴근하면서 평가 받는 전형이 좀 가혹한 편이라 생각을 했다. 많이 뽑으면 또 모를까, 6명이라는 인원을 5일 동안 붙잡아두고 인성을 비롯한 다양한 역량을 엿보는 전형이라니. 그나마 5일간의 현장 실습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취재나가는 기자를 따라 나가 곁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편집부에 가선 편집을 어떻게 하는지, 편집 영상은 어떻게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되는지까지의 과정을 다 지켜보면서 시스템을 터득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겉에 드러난 과정에선 무엇을 배우는 건지 분명치 못했다. 스스로 무엇을 배울지 잘 탐색해야했다. 내가 배웠던 것을 소개하려 한다.


언론사에 입사한 많은 어른, 선배, 친구가 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참된 언론인으로써의 삶을 사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물론 처음엔 많은 이들이 정의감에 불타고 불의와 맞써 싸우는 언론인의 모습을 꿈꾼다. 하지만 취업 준비 동안 공부에 지치고, 입사해서는 업무에 지치는 까닭일까, 많은 사람들은 열의에 사로잡힌 언론인에서 오래지 않아 월급쟁이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급한 일반화를 하자면, 나는 멋진 언론인이라고 느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참 언론인을 만나는 일? 그게 이번에 일어났다. 그분의 외모는 여느 인력소에 일감을 구하기위해 9인용 봉고를 기다리는 모습을 가진 노무자와 비슷하다. 숱이 애매한 콧수염과 턱수염에 색이 희끗한 가닥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그 모습은 흡사 근현대사 교과서 속 관리되지 않은 한 독립군의 수염을 떠오르게 한다. 복장은 단순하다. 잘 어울리는 슬랙스바지에 회색 티셔츠다. 걸음 걸이는 구름 위를 걷듯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안경은 매력포인트다. 안경을 쓴 모습을 보기 힘들다. 안경은 머리 위에 얹어져 있다거나, 걸어다닐 땐 손으로 휙휙 돌리는 장난감일 뿐이다. 그분의 첫인상은 연차 적당히 쌓여 회사는 내쫓을 수도, 일을 막 시킬 수도 없는 한량의 모습에 그쳤다.


하지만, 우연히 그 언론사 이름으로 여러 매체에 검색해보면서 그분의 사진을 발견하며 그분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건 법원 앞에서 동료 둘과 무죄 선고를 받은 뒤 찍은 사진이었다. 재판은 2012년 해고 노동자 복직을 위해 임원실을 무단 점거했다는 혐의에서 이뤄졌다.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더 시간을 거슬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봤다.

2008년에 MB정권이 낙하산 인사로 사장을 그곳에 내려보냈다. 언론사에 기득권의 정치논리가 노골적으로 침입한 사례였다. 이에 노조에서 반발이 크게 일었고, 낙하산 사장의 퇴진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퇴진 운동을 가장 격렬하게 주도한 사람이 바로 그분이었다. 그는 이 언론사 노조에서 힘깨나 쓰는 자리에 있던 분이었다. 이 퇴진운동으로 나중에 그 사장은 물러났지만, 노조에서 6명이 해고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노조는 부당하게 해고당한 6명의 복직을 위해 힘썼다. 3명은 다행히 복직됐고, 남은 3명은 아직이다. 그리고 노조는 아직까지 그 복직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수염 애매하게 기르는 그분은 법정에 피고로 서면서까지 그 목소리를 아직까지 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분은 이 언론사 개국 초창기 멤버다. 그분과 동기인 분들은 다들 부장이다. 원래대로라면 번듯한 책상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솔해야 한다. 그러나 이분은 부서가 아닌 팀장을 맡고 있다. 노조 활동으로 임원진의 미움도 차곡차곡 쌓아갔고, 차곡차곡 승진했던 동기들만큼의 회사에서의 지위는 무리가 되었다. 스스로가 말하길 지금의 팀장 자리도, 자연스럽게 얻은 자리도 아니었고 새 사장이 부임하면서 노사분규 해결을 위한 탕평책, 즉 기계적 중립 인사의 일환이었다고 소개했다. 더 좋은 책상에서, 더 좋은 직위에 없어도 그분은 불만스러운 모습은 없었다.


그분과 자투리 시간에 빙수를 먹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언론이 무슨 일을 하는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 말이다. 그 이야기엔 참 언론인이 가져야할 자세와 마인드가 다 녹아있었다.  이야기를 할 때 그분의 눈은 반짝였고, 지원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가식도 아니었고 폼 한번 잡아보려는 허튼 짓도 없었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나서 이번 5일 동안의 전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이전엔 회사 사람 그 누구도 5일 동안 진행되는 전형을 두고 지원자들의 시선에서 공감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분은 90년대에 이 언론사에 들어왔지만 2016년에 입사를 희망하는 청년들의 입장과 기분을 신기하리만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분은 자기가 담당하는 시간엔 우리더러 편히 있으라 말했고, 부담 갖을 필요 없다고 말했다. 모든 6명에게 차등 없이 같은 점수를 주겠다고 말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를 평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될 뿐더러 그 찰나의 시간으로 인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느 평가관이나 면접관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이런 말은 그저 지원자끼리 악에 받쳐 한탄하거나 불평할 때나 할 법한 소리들이었다. 하는 말 하나하나가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그 팀의 차장에게도 교육을 받을 시간이 있었다. 그 차장은 그분이 없는 자리에서, 그분이 얼마나 똑똑한지 그리고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극찬하기 바빴다. 게다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도 그분을 정신적 지주라고 치켜세웠다. 상하관계 확실한 회사에서, 더구나 회사사람도 아닌 우리들에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해 좋은 소리를 하는 걸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던가.


인턴 활동이 끝나갈 무렵 부장급 실무진이 참석하는 저녁 회식 자리가 있었다. 그것 역시 평가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인턴들은 실무진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힘썼고 앞에 놓이는 술을 꼬박꼬박 비우는 데 열중해야 했기 때문에 이미 온전한 저녁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한참 시끄러운 와중에 같은 식당에 있던 인사팀장이 잠깐 인사하러 테이블로 왔다. 인사팀장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발언에 신중했다. 실무진 말들도 구색 맞추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안 해도 될 말들이 굳이 오고 갔고, 형식적인 대화에 따분해질 무렵, 그분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렇게 훌륭한 인재가 6명이나 있는데, 인사팀장님 이번에 몇 명 뽑는다고요?"

인사팀장은 당황했다. 뽑을 인원은 매우 적었고, 자리한 6명 중 대부분이 다음주면 인연을 달리할 사람들인데 그 앞에서 어찌 함부로 발언을 하리. 그분은 인턴들이 가장 궁금했지만 함부로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대신 던져줬고, 6명이 모두 훌륭하다고 얘기해줬다. 그 말 한마디는 자리에 있는 인턴에게 경쟁하고 눈치보느라 소멸했던 자존심을 되살려주었다. 당황하는 인사팀장은 회사를 대변했고, 그분의 당찬 질문은 우리를 대변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통쾌한 순간이었다.


5일이란 시간이 120시간이라는 걸 체감하기도 전에 지나갔다. 나는 괄목할 만한 것을 터득하지도, 완전히 무지한 세계를 개척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분을 알게 되었다는 점, 멋진 삶을 사는 언론인을 진짜 있다는 점, 가식 없이 다른 세대를 절실히 공감해줄 어른이 있다는 점, 내 이득이 아닌 동료를 위해 수 년을 법정에서 싸우는 사람이 있다는 점, 부당한 정권에 맞써 싸우는 이를 직접 눈 앞에서 보고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모두 내 소중한 자산이 되어 나를 한껏 더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