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리뷰] 영화 시카리오; 인간 일반의 클리셰를 파괴한다.



 인간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지속된 문명 속에 사노라면 종종 클리셰들을 만나기 일쑤다. 못된 범죄가 발생하면 주변 상황을 보면서 살인 동기나 방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강간이나 살인 같은 강력 범죄가 어느 정도 추악하냐에 따라 우리 사회에 안겨줄 파급력을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범죄라는 악의 형태를 우리가 경험했던 것을 통해 머릿속에 쌓았으며,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견고한 성을 쌓았다. 하지만 그동안 견고하다고 생각해온 그 상식의 성을 무참히 깨버리고 충격을 안겨준다면 어떨까. 영화 '시카리오'는 법의 울타리 안에서 잔혹한 범죄로부터 안전하게 살아오고, 뉴스로 한정되고 반복되는 범죄만을 마주했던 일반인들에게 삶에서 체득한 인간 사회 클리셰를 무자비하게 박살내주는 영화다. 바로 강력 범죄를 밥먹듯 자행하는 마약 카르텔 이야기를 다룬다. 카르텔이 보여주는 범죄의 패턴은 물론 이들에 대항하는 사법단체의 모습은 관객에게 매우 낯선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선과 악을 해체한다. 어찌보면 우리 일상에서는 선과 악의 영역은 단순하다. 예컨대 법을 수호하는 경찰은은 선하고, 범죄자는 악하다. 복잡해봤자, 특정 경우에 경찰이 이따금씩 악역이 되고 시민 혹은 용의자가 선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선과 악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마약 카르텔이 명실상부 절대악으로 소개되는가 싶었지만 CIA가 초법적으로 대항하고 마지막에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가 충격적인 복수극을 자행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절대악과 그의 선량한 가족들이 무참히 죽기 전에 표정 가득히 보여주는 연민과 동정심으로 하여금 관객들이 정해버린 선과 악의 역할 분배는 뒤흔들린다. 복수극이 끝이 나고 마지막으로 믿었던 최후의 선한 주인공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분)가 혼동스러운 선과 악의 질서를 바로 잡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녀 역시도 알레한드로의 협박에 못 이기고 굴복한다. 그를 사살할 수 있었음에도 쏘지 않았고 결국 불법을 묵인하는 꼴이 되었다. 결국 케이트도 악했다. 시종일관 넉넉하지만 여느 가족들처럼 평범했던 실비오 가족에게도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해졌다. 아침으로 계란 같은 수수한 음식을 먹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카르텔의 운반책이 되었지만 결국 그도 복수극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렇다고 실비오를 선하다고 해야할지 악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평소 생각한 선과 악의 구분지음이 이렇게 근본 없이 뒤흔들리는 가치였음을 영화는 노골적으로 꼬집는다.


 이동진 평론가가 "이런 게 바로 내내 멱살잡고 끌고가는 영화"라고 말했듯 관객들이 영화 끝까지 긴장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눈쌀 찌푸러지는 억지 편집이나 과도한 액션도 없다. 그 긴장감의 원천은 다름아닌 예측불가함에 있다. 관객들은 이미 수많은 영화나 인간 사회 일반을 겪으며 여러 가지 사건 흐름을 마음 속으로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아저씨'에서 차태식이 복수심에 불타 악당 소굴에 처들어갈 때도 관객들은 깊은 긴장까지는 하지 않는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복수하면서도 긴장감은 나지 않는 건 그동안 보여준 복수극의 클리셰에 이미 익숙해진 탓이다. 어떤 전개나 결과가 나오든 이미 관객들이 속으로 예측한 내용에서 멀리 떨어진 게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시카리오'는 계속해서 우리의 경험 일반을 초월한다. 오프닝씬에서 보여주는 범죄의 스케일은 관객들에게 불쾌한 낯섦을 안겨주고 후아레스에서 모든 장면은 '설마 지구에 이런 곳이 있는 건가'라는 의심을 품게 할 정도다. CIA와 카르텔이 보여주는 범죄의 형태나 인물들의 태도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야만성이 뚝뚝 흘러내린다. 정점은 알레한드로다. 처음엔 신비주의 컨셉트였으나 서서히 케이트에 훈훈한 모습도 보여주면서 예측 가능한 인물군으로 가닥이 잡히나 했지만, 케이트에게 총을 두 방 먹이고 내던지는 말 한마디로 관객을 다시 예측 불가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알레한드로가 파우스토의 가족과 만나는 장면에서 혼돈에 빠진 관객은 대사 몇 마디 주고 받는 동안 파우스토의 두 아들처럼 벌벌 떨 수밖에 없다. 총구를 겨누고 쏠 것인지 안 쏠 것인지를 관객들은 예상하기 마련인데, 알레한드로는 쏴도 충격이고 안 쏴도 충격이라 관객들은 패닉에 빠지는 것이다. 알레한드로가 가족들과 한 식탁에 앉았을 때, 관객들이 할 법한 예측은 이렇지 않을까. 

1) 파우스토만 쏘고 가족은 살려준다, 2) 따끔한 경고를 하는 걸로 마치고 돌아간다, 3)가족들만 죽인다, 4)모두 죽인다

여기서 알레한드로는 갑작스럽게 두 아들과 아내를 먼저 쏴 죽인다. 그리고 파우스토가 두려워하고 크게 놀라는 '반응을 보고나서' 그도 역시 죽인다. 영화에서 질리게 들었던 총소리가 유난히 매섭고 더 깜짝깜짝 놀랍다.


 영화가 던지는 화두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도 큰 의의가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정의는 의회에서, 정부에서, 대학교에서, 국제단체에서 떠드는 그런 정의다. 그리고 사람들 마음 속에 각자가 품은 정의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그 수많은 정의들은 사실 유사한 양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린 지구촌 특정 지역의 광경은 그동안 알고 있던 정의를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깨치게 해준다. '시카리오'에서 적용할 수 있는 정의를 속 시원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있을까. 맷(조슈 브롤린 분)이 이야기한 것처럼 세계 인구 20%를 마약을 끊게 할 수 없다면 마약 세계의 질서를 법의 바깥 영역에서라도 잡을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그렇게 한다면, 절대 정의가 세계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많은 사람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겠지만.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 나면, '나는 정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뽑겠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유권자나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정치인이나 '사회 정의를 달성하는 데 이바지하는 언론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저널리스트의 말은 모두 공허하다. 정의라 하면 선과 악을 구분지을 수 있는 기준이 될 텐데, 선과 악은 무엇이고, 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끊어내야하는 걸까.  영화는 그걸 묻는다.